본문 바로가기

여러가지 해외이슈

"음악과 인권유린의 교차로: 카스트라토의 역사"

카스트레이션을 선택한 이탈리안 소년들은 성장 후유증과 트라우마를 복해야했다.   사진출처:트위터

16세기부터 시작된 카스트라토 이야기는 음악과 인권의 교차점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다. 이들은 고유의 가창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소년 시절 고의로 거세되었다. 이들은 성인이 되어도 고음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가수였다. 

이탈리아 가정에서는 아들들이 카스트라토가 되어 명성과 부를 얻길 바랐고, 많은 아이들이 이를 선택했다. 바티칸은 여성이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한 결정을 내렸고, 이로 인해 카스트라토의 인기가 높아졌다. 바티칸은 1589년 교황 시스투스 5세의 법령으로 카스트라토를 소년과 팔세토 가수 대신 세인트 피터 성가대에 편입시켰다. 

 

이후로도 수십 세대에 걸쳐 이탈리아의 어린 소년들은 변성기를 막아내어 목소리를 보존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의 가창력은 오페라 관객과 황제, 심지어는 교황마저 황홀하게 했다. 


일반인의 한계를 넘어선 그들의 가창력은 오페라 관객들과 황제그리고 교황마저 황홀하게 했고 시스타인 성당에 카스트라토들을 성가대로 고용했다. 


1500년대부터 이어온 이 관행에 대해 바티칸이 공식적으로 규탄하고, 거세자를 가톨릭에서 제명시키는등 처벌을 시행했다. 1902년 바티칸내 교황의 관저 예배실인 시스티나 성당에 카스트라토들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그러나 후대의 교황들이 음성적으로 시행되는 거세술을 후원하게 된 이유는 바로 카스트라토가 선사하는 성악의 아름다움과 흡입력때문이였다. 아이들이 말에서 떨어져서, 또는 동물에게 물렸다는 이유를 핑계로 불법적인 거세술이 암암리에 실행된 카스트라토를 교황이 고용했다. 

교황 시스토 5세는 대중들이 ”천사의 목소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1589년에 교황의 칙령을 내려 바티칸에 카스트라토를 두도록 승인했다. 일단 교회의 최고권위자가 승인한 관행이 되자, 카스트라토들이 용인되기 시작했다. 헨델과 메이어비어, 로지니 같은 음악가들은 카스트라토만을 위한 교회음악을 별도로 작곡하기도 했다. 


교횡 베네딕토 16세자신이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참조하여 거세제도가 불법이라고 인정했으나, 1748년에는 직속 주교가 거세제도를 금지령을 내려야한다는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카스트라토들이 없어지면 교회에 신도수가 줄어들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카스트라토는 교회음악에서 중요하고 호소력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세인트 피터 성당과 교황청의 시스타인 성당에서 계속 카스트라토 성가대를 유지했다. 
그러나 18세기에 거세가 금지되면서 카스트라토는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들의 역사는 음악 연구와 인권 문제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카스트라토의 존재는 당시 사회의 가혹함과 중요한 가치를 반영하며, 교회음악의 역사가 인권 유린을 기반으로 성장해왔다는 불편한 진실이 함께 마주해야하는 가혹한 역사의그늘이다.. 이제는 사라진 카스트라토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교황이 음성적으로 장려하고 기록을 은폐시킬 만큼 가공할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